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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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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7년차 디자이너 2024. 12. 24. 12:57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영화라기보다는 살아 숨 쉬는 회화에 가깝다. 흑백의 화면은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원주민 출신 가정부 클레오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건이 어우러진 복잡다단한 서사를 펼쳐 보인다.쿠아론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토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는 단순한 자전적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클레오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멕시코 사회의 계급, 인종, 젠더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그녀의 조용한 헌신과 고통은 영화의 중심축이 되어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영화의 시각적 미학은 압도적이다. 쿠아론은 직접 촬영을 맡아 64mm 디지털 카메라로 놀라운 흑백 영상을 만들어냈다. 롱테이크와 광각 렌즈를 활용한 장면들은 마치 우리가 그 공간 속을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물이 중요한 모티프로 활용되는데, 세탁물을 빠는 장면부터 바다에서의 극적인 구조 장면까지, 물은 영화 전반에 걸쳐 생명과 죽음, 정화와 혼돈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음향의 활용 또한 탁월하다.

 

대사는 최소화되어 있지만, 일상의 소리들 - 개 짖는 소리, 거리의 소음, 비행기 엔진 소리 - 이 영화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만든다. 이는 마치 기억 속 풍경을 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듯하다.'로마'의 내러티브 구조는 느슨하면서도 치밀하다. 표면적으로는 클레오의 일상을 따라가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멕시코의 정치적, 사회적 격변이 자리 잡고 있다.

 

코르푸스 크리스티 학살 사건을 재현한 장면은 특히 충격적이다. 개인의 소소한 일상과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교차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연약함과 동시에 강인함을 목도하게 된다.배우들의 연기 또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클레오 역의 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전문 배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깊은 내면 연기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녀의 절제된 표정과 몸짓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로마'는 또한 여성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클레오와 그녀가 모시는 집 안주인 소피아의 관계는 복잡하다. 계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한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연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섬세한 묘사다. 쿠아론의 '로마'는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역사가 어떻게 교차하고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과거를 단순히 회상하는 것이 아닌,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로마'는 끝나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레오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마치 그녀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가? '로마'는 그 대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