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회전목마

이창동 감독의 '시' 본문

카테고리 없음

이창동 감독의 '시'

7년차 디자이너 2024. 12. 24. 12:49

이창동 감독의 '시'는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2010년 발표된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시(詩)'의 본질을 탐구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영화는 67세의 양미자(윤정희)가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며 파트타임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미자는 우연히 문화센터의 시 창작반에 등록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손자가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두 사건은 미자의 삶을 뒤흔들며 영화의 주요 축을 형성한다.이창동 감독은 '시'를 통해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한다. 점점 단어를 잃어가는 미자와 시를 쓰려 애쓰는 미자의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녀에게 시 쓰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이자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수단이 된다. 윤정희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그녀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미자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특히 강가에서 꽃을 바라보며 '아름답다'를 되뇌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미자의 순수함과 동시에 그녀가 마주한 현실의 잔인함을 대비시킨다.영화의 미장센은 시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강가의 꽃,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비 오는 거리 등 일상적 풍경들이 미자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영상미를 넘어 미자의 내면 세계를 시각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특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소녀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은유로, 억압된 진실과 미자의 죄책감을 상징한다.

 

'시'는 단순히 노년의 삶이나 치매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세대 간 단절,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고뇌를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손자의 범죄에 대한 미자의 대응은 도덕적 딜레마를 넘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정의관을 날카롭게 지적한다.음악의 사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음악은 극히 절제되어 있지만, 간간이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미자의 내면을 대변하듯 서정적이면서도 애잔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은 미자의 마지막 시를 청각적으로 형상화하여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영화의 결말은 열려있다. 미자가 쓴 시의 내용은 끝내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열린 결말을 넘어, '시'의 본질에 대한 이창동 감독의 통찰을 보여준다. 진정한 시는 말해지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시'는 느리지만 깊이 있게 흐른다. 이는 마치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르다 문득 소용돌이치는 미자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이창동 감독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카메라를 움직이며, 미자의 일상과 내면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시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이창동 감독은 관객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시'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담아낸 서정시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에세이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실한 '시'를 완성했다. 그 '시'는 스크린을 넘어 우리의 현실 속으로 스며들어,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지닌 특별한 힘이자,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회자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