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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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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7년차 디자이너 2024. 12. 24. 12:26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의 삶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흑산도 유배지에서 어부 창대와 함께 물고기를 연구하며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정약전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겉보기에는 잔잔한 물결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로는 깊은 통찰의 물살이 흐르고 있다.영화는 1801년 신유박해로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설경구)이 어부 창대(변요한)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둘의 만남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색하다. 양반 사대부와 천민 어부.

 

그러나 이 어울리지 않는 듯한 조합이 '자산어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가르치고, 창대는 정약전에게 물고기에 대해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계급의 벽을 넘어 진정한 우정을 쌓아간다.이준익 감독 특유의 담백하고 절제된 연출이 돋보인다. 흑백 화면은 시대적 배경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낸다. 특히 물고기를 잡는 장면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들은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설경구와 변요한의 연기 호흡도 일품이다. 설경구는 학자로서의 위엄과 인간적인 고뇌를 절묘하게 balance 잡아내며, 변요한은 순박하면서도 예리한 창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두 배우의 미세한 표정 연기는 때로는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영화는 단순히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산어보'를 쓰는 과정을 통해 정약전이 겪는 내적 성장과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던 물고기 연구가, 점차 그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또한 영화는 물고기라는 은유를 통해 인간 사회의 모습을 비춘다. 다양한 물고기들의 생태는 곧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모습은 당시 조선 사회의 계급 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메시지도 전한다. 정약전이 말하듯 "물고기든 사람이든 모두가 귀한 생명"인 것이다.'자산어보'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지식의 가치, 계급 간의 벽,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촘촘히 엮여있다. 이는 영화를 단순한 사극을 넘어 깊이 있는 인문학적 고찰로 승화시킨다.다만 영화의 느린 템포와 차분한 전개는 일부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전개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마치 물고기를 관찰하듯 인내심을 가지고 영화를 바라본다면, 그 안에서 깊은 울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자산어보'는 물고기를 통해 인간을 보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자산어보'는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이 질문은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물결치듯 남을 것이다.